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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에 대승을 한 전투입니다.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죽인 뒤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연합부대를 재구성하고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죽이고 200여명에 부상을 입혔습니다다. 이렇게 압승을 거둔 것은 독립군의 뛰어난 작전 계획 및 수행능력, 필승의 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191년 3.1 운동이 일제의 무력 진압 앞에 와해된 후, 독립운동은 실력 양성론과 무장 투쟁론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연해주, 만주 지역 민족 진영의 항일 무장 투쟁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입작전은 32회였으며, 피해를 당한 일제 관공서와 경찰관 주재소가 34곳에 달했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는 이와 같은 무장 투쟁론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 결과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대승으로 끝났는데  '독립 신문' 1920년 12월 25일자에 게재된 임시 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일본군은 157명 전사, 200여 명 중상, 100여 명의 경상자를 내고 완전히 참패하였습니다. 반면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의 경미한 것이었습니다.

    1920년 6월 27일자 중국 신문 '상해 신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한국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은 150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독립군은 160정의 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했다고 합니다.

    역사적 의의

    봉오동 전투는 조선과 만주의 국경지역에서 대한민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첫 교전은 아니었으나 대규모 전투로는 처음이었습니다. 정규군이 아닌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으며, 아울러 만주 일대 의병 조직의 확대와 참가자 증가로 1920년대 무장 독립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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